나안나

끝나지 않은 순간들

2023/5/26 ~ 6/20

전시 소개

끝나지 않은 순간들

나안나의 캔버스는 무의식과 의식이 조우하는 장소이다. 무의식 중 자동기술법으로 그린 이미지들과 경험과 생각, 상상 속에서 잡아 올린 이미지들은 캔버스 위에서 결합되고, 이 과정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내면의 사유들이 드러난다. 작가에게 작업이란 찰나의 사라질 것들을 붙잡아 하나의 존재로 기록하는 과정이며, 이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이자 작은 세계를 이룸으로써 그들만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죽은 물고기들을 위한 송가 l 나안나의 작업은 부드럽고 포근한 색채의 배경 위 의인화된 물고기가 주제부를 차지하는 몽환적 세계를 통해 관람자에게 다정한 재치와 해학을 선사한다.

넓고 깊은 바다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물고기는 어린 시절부터 작가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물고기는 신비롭고 존귀한 생명체가 아닌 그저 인간의 먹을거리로써 애정과 연민의 대상에 불과하다. 수산시장에서 수많은 물고기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일을 계기로 작가는 이들이 각자의 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의 순간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하여 이들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빌어주고자 <초상화>연작을 이어왔다. 

모던 어해화(魚蟹畫) l 나안나의 작업은 일견 현대판 민화(民畵)나 불화(佛畵)를 연상시킨다. 물고기 그림은 조선시대 민화 중 널리 그려졌던 어해화(魚蟹畫:수생생물을 그린 그림)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다산(多産)과 풍요의 상징이자 흉한기운을 막아주는 길상벽사(吉祥辟邪), 출세를 뜻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왔다. 한편 연꽃, 나뭇잎과 같은 자연물의 형태와 무늬뿐만 아니라 윤곽선을 그린 뒤 안쪽을 채색하는 구륵법(鉤勒法)과 선으로 윤곽만 그리는 백묘법(白描法) 등 표현 기법의 면에서는 불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전통회화에서 물고기가 길흉화복을 기원하는 대상이라면 나안나의 작업에서는 작가 자신, 또는 인간의 생애라는 사적 의미가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확장된다.

너와 나 l 작품 속 다양한 상황에 놓인 물고기들의 처지는 보는 이의 웃음을 유발하지만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커다란 눈망울은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입에 낚싯바늘이 걸리거나 수풀 뒤에 숨어있는, 또는 눈물이 맺힌 애잔한 얼굴. 그리고 먹이사슬 하단의 작고 흔한 종이라는 점 또한 우리 모습과 닮아있다. 즉 이들은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과 삶을 대변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이처럼 나안나 작업은 부드럽지만 단단한 붓질로 우리 주변의 사소한 사물들에 상상력을 불어넣고, 이로써 우리의 경직된 사유에 균열과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다.

작품 갤러리